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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형목사 - 부활과 목양

1. 고린도전서 15장에 나타난 부활 신앙의 기초와 세 단계

장재형목사는 부활절을 맞이하여, 성도들이 부활 신앙의 기초를 정확히 이해하고 견고히 붙들도록 돕기 위해 고린도전서 15장의 중요성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특히 "부활"이 무엇이며, 그것이 신앙인들에게 어떠한 의미를 주는지에 대해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세 단계로 명확하게 풀어놓았다고 설명한다.

첫 번째 단계는 "주님의 부활, 그리스도의 부활" 자체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1절에서 11절까지를 통해 주님의 부활이 성경대로 이루어졌음을 선언하고 있다. 예수께서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부활하셨음을 분명히 증언하며, 이 부활의 증인이 많았음을 강조한다. 오백여 형제에게 한꺼번에 나타나시고, 그중 태반이 살아 있었다고 증언할 정도로 눈으로 직접 본 사람이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주님의 수제자 베드로(게바)나 열두 제자(실제로는 예수의 승천 후 가룟 유다를 제외한 열한 제자)뿐 아니라 주님의 형제 야고보, 그리고 바울 자신에게도 나타나신 사실을 밝힌다. 이러한 실제적 증언은 교회가 주님의 부활을 확신하는 데에 절대적인 근거가 되었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부활을 어떻게 이해하고 전할 수 있겠느냐?"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 답은 "바울이 너무나도 정확하게 정리해 놓았다"는 것이다. 성도들이 고린도전서 15장 초반부를 읽고 묵상할 때, 우리가 믿는 부활이 헛된 것이 아니며, 역사 속에 확실히 일어난 사건임을 체득하게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바울이 '성경대로'라는 표현을 반복하는 것은,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의 죽음과 부활을 예수께서 온전히 이루셨음을 밝히기 위함이기도 하다. 그 결과 교회와 성도들은 "그리스도는 참으로 부활하셨다"라는 첫 번째 단계를 견고히 붙들 수 있다.

두 번째 단계는 12절부터 34절에 기록된 "죽은 자들의 부활"이다. 바울은 여기서 "만약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가 전파하는 복음도 헛되고 너희 믿음도 헛될 것이다"라는 논지를 펼친다. 교회 안에서 "죽은 자의 부활은 불가능하다"라는 논란이 일어날 때, 바울은 그 논란을 정확히 반박하며 부활의 필연성을 설명한다. "주님이 부활하셨다면, 믿는 우리 또한 부활할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신앙 자체가 무너지고 말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해서 길고 자세하게, 매우 깊이 있는 해설을 덧붙임으로써, 믿는 자들에게도 부활이 주어짐을 확증시킨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을 강조하면서, "오늘날도 여전히 사람들이 가지는 큰 질문, 즉 '우리의 죽은 몸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는가?' '우리 역시 예수님처럼 부활에 동참할 수 있는가?'와 같은 의문에 대해 바울이 명쾌하게 설명해 준다"고 말한다. 교회 역사 속에서, 고린도전서 15장을 차근차근 읽고 묵상하며 기독교의 종말론과 부활관을 정립한 신앙인들이 적지 않았다. 죽음 뒤에 아무것도 없다는 허무주의적 사고를 깨뜨리고,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으니 우리도 부활의 소망을 갖는다"는 점이 신앙의 토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세 번째 단계는 35절부터 58절까지 나타난 "육체의 부활"에 대한 해설이다. 바울은 여기서 "어떻게 죽은 몸이 다시 살아날 수 있는가?"라는 의문에 '체인지 오브 스테이트(Change of State)', 즉 "형태의 변화"로 설명을 이어간다. 이른바 애벌레가 번데기를 거쳐 나비가 되는 변화,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새 싹이 올라오듯이, 부활도 그러한 원리로써 설명된다. "너희가 자연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들을 보며 알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우리 몸도 궁극적으로 '영광스러운 몸', '신령한 몸'으로 변화를 입는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왜 많은 사람들이 '육체 부활'을 믿지 못하느냐고 사도 바울이 호되게 책망하듯 말하는 것과도 같다"고 설명하며, "죽음 이후의 새로운 시작"이라는 성경의 메시지를 강조한다.

바울은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다(고전 15:44)"라는 구절을 근거로,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실 때 '영광스러운 몸'을 입으셨듯이, 우리 또한 주님의 부활을 따라갈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이는 부활의 신앙을 갖는 자들에게 거룩한 기대와 소망을 불어넣는 메시지다. 장재형목사는 "예수님의 부활이 '맏물이 되고', 그 뒤를 따라 우리도 영광스러운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할 것"이라는 고린도전서 15장의 가르침을 되짚으며,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사도 바울이 명징하게 제시해 놓았다"고 요약한다.

이처럼 고린도전서 15장 전체는 "그리스도의 부활 → 육체의 부활"이라는 큰 틀로 구성되어 있고, 이것이 기독교 교리의 중요한 뼈대를 이루어 왔다. 초대교회부터 현대 교회에 이르기까지, 부활 신앙을 가르칠 때 빠지지 않고 인용되는 장이기도 하다. 특히 장재형목사는 "바울이 제시한 이 3단계 부활의 교리는 우리 믿음의 근간이며, 교회가 진정한 복음을 붙드는 데에 핵심적 역할을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한편 복음서들, 즉 마태복음 28장, 마가복음 16장, 누가복음 24장, 요한복음 20장에도 예수님의 부활 장면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이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는 '역사의 기록'과 '증인들의 증언'을 근거로, 독자들이 부활을 믿도록 초대한다. 특히 요한복음 20장에서 예수께서 막달라 마리아, 베드로, 요한 등에게 순차적으로 나타나신 후, 마지막으로 도마에게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말씀하신 장면은, 오늘날 교회가 부활 신앙을 전할 때 중요한 메시지로 작용한다.

도마와 같이 의심이 많았던 이가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보고,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겠다"고 했을 정도로, 어떤 신앙인은 부활의 신비를 쉽게 납득하지 못한다. 하지만 주님은 실제로 자신을 보여 주심으로써 그의 의심을 풀어주셨고,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선포하셨다. 복음서 저자들은 이것이 바로 "교회가 전파해야 할 복음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교회는 "이 역사적 사실을 견고히 붙들라. 더 이상 뚜렷한 증거가 어디 있겠느냐"라는 메시지를 동일하게 선포해야 한다고 장재형목사는 말한다.

이어 요한복음 20장 30~31절은 복음서의 기록 목적을 명시한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 이는 복음서가 단순한 전기의 기록이나 역사적 사실의 나열을 넘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지는 "생명"에 초점을 맞춘 영적 보고임을 보여 준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20장으로 끝나지 않고, 한 장이 더 붙어 있다. 바로 21장이다. 전통적으로 요한복음 21장은 "부록" 혹은 "에필로그"와 같은 위치를 차지한다고 해석되어 왔다. 대개 요한복음 20장 30~31절이 복음서의 결론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장재형목사는 "왜 요한복음 21장이 부록처럼 덧붙여졌을까?"라는 문제의식을 제기한다. 그리고 이 질문을 풀어가기 위해 종말론과 초대교회의 역사, 그리고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겪는 교회의 혼돈 등을 함께 설명한다.

2. 요한복음 21장의 의미와 '내 양을 먹이라'라는 교회의 사명

장재형목사는 요한복음 21장이 쓰인 이유를 "주의 부활과 승천 이후, 역사 속에서 교회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분명히 제시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한다. 이미 요한복음 20장에서 부활의 사실이 충분히 증언되었고, "복음을 통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는 기록 목적 또한 제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한 장을 더 추가함으로써, 무엇을 말하려고 했을까?

우선 요한복음 21장 1절은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라며, 부활하신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디베랴 바다)에서 제자들에게 다시 보이신 장면을 전한다. 그리고 2절에서 베드로, 도마, 나다나엘, 세베대의 아들들(야고보와 요한) 등 일곱 제자가 함께 있는 모습이 보인다. 20장에는 열한 제자가 등장했으나, 21장에서는 일곱 명만 특별히 묘사된다. 복음서는 신학적 메시지를 담은 "그림 언어"로 기록되었다고 장재형목사는 말한다. 이런 장면 하나하나가 교회의 상황을 비유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주님의 부활을 목격했음에도, 제자들은 혼란에 빠져 있었다. 예수께서 이미 살아나셨음을 알았지만, 향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명확히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을 수 있다. 부활 후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그 빈자리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나 답답함을 느꼈을 수도 있다. 그래서 베드로가 나서서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요 21:3) 하자, 다른 제자들도 함께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로 간다. 그러나 밤새 아무것도 잡지 못한 채 허탕치고 만다.

이때 부활하신 예수께서 새벽에 그들에게 나타나시지만, 제자들은 처음에 그가 예수님이심을 알아보지 못한다(4절). 예수께서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라고 물으시자 "없나이다"라고 답한다(5절). "얘들아(Children)"라는 부름이 눈길을 끄는데, 이는 제자들의 영적 상태를 드러내는 상징적 표현으로도 볼 수 있다. 아직 미성숙하고 혼란스러운 모습, '어린아이' 같은 상태를 반영한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예수께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하셨을 때 곧바로 순종했고, 그물이 고기로 가득 차 들어 올릴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6절). 누가복음 5장에 나타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말씀과도 유사한 장면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사건이 "부활 이후, 교회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드러내는 핵심 장면이라고 강조한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처음 부르실 때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 4:19)라고 하셨는데, 그 말씀을 떠올리게 한다는 것이다.

곧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 제자들은, 그리고 오늘날 교회는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여" 모든 민족에게 주님의 구원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는 말씀이 그 원리다. 한편, 고기를 많이 잡았음에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요 21:11)은 "복음은 온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을 다 받아들여도 결코 찢어지지 않는다"는 우주적이고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해석되어 왔다. 교회의 선교, 전도, 그리고 회심자들이 한 몸을 이루는 이 놀라운 역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유지되며 결코 무너뜨릴 수 없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오래전부터 많은 신학자들이 요한복음 21장 11절에 기록된 '153마리'라는 숫자의 의미를 깊이 연구해 왔음을 언급한다. 고대 교부 어거스틴도 이 숫자를 '매직 넘버'처럼 여겨 무엇을 상징하는지 깊이 고민했다. 세월이 흐르며 지구상의 민족이나 종족, 생물 종이 밝혀지면서, 일부 해석가들은 "153이라는 표시는 '온 인류와 온 피조물 전체'를 비유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요한이 그 숫자를 매우 구체적으로 기록함으로써, "전 인류를 대상으로 하는 복음 전파"와 "그물을 끌어도 찢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이후 장면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는데, 이미 숯불과 그 위에 놓인 생선, 그리고 떡이 준비되어 있었다(요 21:9~12). 이는 "주님이 우리의 모든 것을 이미 예비하시고, 우리를 먹이시며 돌보신다"는 메타포이자, 최후의 만찬 이후 교회가 계속해서 거행해야 할 성찬을 상기시키는 장면으로 해석되곤 한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숯불"이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하던 장면(요 18:18)에도 언급되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베드로의 수치와 실패가 떠오르는 그 숯불 앞에, 이제는 부활하신 주님이 베드로를 다시 세우는 상징적 그림이 펼쳐지는 것이다.

주님은 이미 생선과 떡을 갖추어 제자들을 초대하시지만, 동시에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요 21:10)고도 하신다. 교회가 세상에서 전도하여 이끌어 온 영혼들을 주님께로 가져올 때, "주의 마련하신 식탁"과 연결되어 하나의 온전한 교제가 이루어지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결국 교회가 해야 할 일은,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그물을 던져 사람들을 낚고, 그들을 주님께로 이끄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은 이미 준비한 떡과 생선으로 우리를 먹이고 교제하게 하신다"고 말한다.

계속해서 요한복음 21장 15절 이후에 나오는, 예수와 베드로 사이의 유명한 문답이 등장한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이다. 주님은 세 번이나 이 질문을 반복하고, 베드로는 세 번 다 "주여,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답한다. 이에 예수께서는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명령하신다(요 21:15~17). 여기서 장재형목사는 중요한 교회의 책임이 드러난다고 강조한다.

교회의 존재 이유 중 하나가 선교라면, 다른 하나는 "목양"이다. 한편으로는 세상으로 나가 잃어버린 영혼을 전도하는 "사람을 낚는 어부"의 사명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미 신앙 공동체 안에 들어온 "어린 양들"을 잘 돌보고 양육하는 "목자"의 사명이 있다. 베드로를 통해 교회에 주어진 이 명령, "내 양을 먹이라"는 말은 "주를 사랑한다면 당연히 그분의 양 떼를 사랑과 헌신으로 섬기라"는 뜻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던 과거가, 이제 부활하신 주님 앞에서 세 번의 문답으로 회복되는 과정은 교회사 전체에 큰 상징이 되었다. "주님은 실수와 배신의 경험이 있는 자라도 회복시키신다"는 복음의 본질이 드러나는 장면이기도 하다. 동시에 이 문답은 이후 교회가 세워지고, 지도자들이 세워지는 원리의 토대가 되었다. 목회자, 장로, 교사 등 교회 지도자들은 단지 조직을 운영하거나 이벤트를 기획하기보다, 진정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양들을 먹이는 "목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바로 이 점을 가장 중요하게 강조한다.

또한 요한복음 21장 후반부는 베드로가 "이 사람(요한)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라고 물을 때, 예수께서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요 21:22)고 답하시는 장면을 기록한다. 교회 내에서는 종종 "주님이 언제 다시 오시는가? 이 사람이 죽지 않고 주님의 재림을 보는가?" 같은 종말론적 추측과 혼란이 일어나곤 한다. 초대교회도 임박한 재림을 기대했으나, 실제로 시간이 흐르자 "왜 주님이 오시지 않는가?"라는 의문이 커졌고, 그로 인해 말썽이 생기기도 했다. 요한공동체 안에서도 사도 요한이 오래 살자, "아, 이 사람은 죽지 않는 건가?" 하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은 네가 간섭할 문제가 아니다. 너는 네 길을 가라. 너는 나를 따르라"라는 일종의 책망과 교훈을 주신다. 재림의 때와 방식을 두고 논쟁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회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내 양을 먹이며, 세상에 나가 복음을 전하고, 서로를 돌보는 삶을 사는 것"이라는 메시지다. 이것이 요한복음 21장이 부록처럼 덧붙여진 궁극적 이유라고 장재형목사는 정리한다.

즉, 복음서는 20장으로 모든 부활 증언이 끝났으나, 교회가 이 땅에서 그 사명을 감당하는 과정을 "갈릴리 바다"로 돌아간 제자들 이야기를 통해 구체적으로 보여 주고, 재림의 시기를 놓고 혼동하는 성도들을 향해 "너는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을 다시 들려줌으로써 결론을 맺는 것이다.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요 21:25)라는 마지막 구절은, 주님의 사역이 얼마나 크고 광대하며 끝이 없음을 함축적으로 선포한다.

결국 요한복음 21장 전체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부활을 믿는 교회와 성도는, 주님의 명령대로 세상으로 나가 영혼을 낚는 일을 해야 하며, 동시에 그 영혼들을 주의 말씀으로 양육하고 돌보며, 재림의 때를 두고 쓸데없는 분쟁에 휩싸이지 말고 오직 주를 따르는 길에 집중하라"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오늘의 교회와 성도들에게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에 대해, "이 부활절을 맞아 우리가 꼭 붙들어야 할 메시지가 요한복음 21장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강조한다. 교회는 전도(선교)와 예배(성례), 그리고 목양(돌봄)이라는 세 가지 중요한 축을 실천함으로써 주님을 사랑하는 삶을 구체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 전도(선교):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해야 한다. 우리의 이웃, 지역사회, 그리고 세계 곳곳을 향해 주님이 주신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이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 중 하나다. "그물을 오른편에 던지라" 하신 명령처럼, 말씀에 순종하여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죽는 것 같으나 실제로는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다.

둘째, 예배(성례): 주님이 마련해 주신 생선과 떡으로 조반을 먹게 하셨듯이, 교회는 성찬을 통해 주님의 살과 피를 기념하고, 그분이 베푸신 생명의 양식을 함께 나눈다. 떡과 포도주로 상징되는 성찬은 교회가 주님과 연합하고, 서로 간에 교제를 나누는 거룩한 예식이다. 장재형목사는 "주님이 예비하신 식탁"이라는 표현을 즐겨 쓰며, 이를 통해 교회가 더욱 주님의 사랑과 희생을 되새긴다고 말한다.

셋째, 목양(돌봄): "내 양을 먹이라"라는 주님의 명령을 좇아,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 그리고 새로 들어오는 자들을 사랑으로 돌보는 일이 필수적이다. 베드로처럼 실패의 순간이 있었던 사람조차도 주님은 다시 세우시고, 목양의 책임을 맡기신다. 이는 곧 교회가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을 실천하는 구체적 방식이기도 하다. 연약한 지체들을 도와주고, 말씀과 기도로 그들을 세워 가는 것이 참된 '주님 사랑'을 나타내는 길이 된다.

장재형목사는 이 모든 과정을 관통하는 핵심 동기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라고 거듭 강조한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주님의 물음에 "주님,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답하는 것은 감정의 문제가 아닌, 삶으로 드러나는 순종과 헌신의 차원이라는 설명이다. 교회 역사 속에서 수많은 신앙 선배들이 박해와 환난을 겪으면서도 복음 전파와 성도 돌보기를 포기하지 않았던 것도, 결국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종말론적 시각도 덧붙여진다. 당시 초대교회는 주님의 재림이 곧 임할 것으로 믿고 살았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다양한 논란과 질문이 생겨났다. 데살로니가교회에서도 "주의 날이 이미 이르렀다"거나 "주님이 곧 오실 텐데 굳이 일할 필요가 있는가?" 등 여러 말들이 퍼져 혼란이 일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를 쓰면서, "주의 날이 이르면, 배교하는 일과 불법의 사람이 드러나는 일 등 먼저 이루어져야 할 일들이 있다"고 설명하고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며 올바른 자세를 권면한다.

마찬가지로 요한복음 21장에서도 "요한은 죽지 않고 주님 재림을 볼 것이다"라는 말이 떠돌았으나, 주님은 "그를 머물게 하더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라고 답하시며 논란을 잠재우신다. 결국 교회가 최우선으로 삼아야 할 것은 재림의 시기나 방식을 둘러싸고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맡겨진 사명에 충성하며 "너는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음성에 반응하는 삶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부활절 이후,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교회가 걸어가야 할 길이다.

장재형목사는 부활절 설교에서 이 메시지를 전하며, "교회는 항상 부활 신앙 위에 서서 세상 끝날까지 전도하고, 예배하며, 서로 돌보는 데 힘써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의 실천적 표현이라고 다시금 결론지었다. 부활을 믿는 신앙인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우리와 동행하시고, 다시 오실 주님을 기대하면서도, 현실 속에서 기진맥진하지 않고,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 속에서 충성스럽게 살아갈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고 하셨고,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18~20)는 약속을 주셨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21장은 교회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압축적으로 보여 준다. 복음서의 다른 장들은 주님의 이적과 가르침,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사실을 자세히 증언하지만, 21장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도 여전히 갈 바를 몰라 방황하던 제자들"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그물을 던져 많은 물고기를 잡아올리는 장면"을 통해 선교의 비전을, "숯불과 떡과 생선을 나누는 장면"을 통해 성찬과 예배를, "세 번의 문답과 '내 양을 먹이라'는 명령"을 통해 목양의 책임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요한은 어떻게 되겠느냐?"라는 질문을 통해 종말과 재림을 바라보는 교회의 태도를 제시한다. 모든 것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부활 신앙을 가진 교회가 세상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고 기다리는가"를 종합적으로 가르치는 것이다.

이처럼 장재형목사는 고린도전서 15장과 요한복음 21장을 연결해 "부활 신앙과 교회의 실천"에 대해 설파한다. 고전 15장은 부활 교리를 교리적·신학적으로 체계화한 텍스트이고, 요 21장은 부활하신 주님이 승천하신 뒤에도 제자들과 교회 공동체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생생하게 보여 주는 '부록'이다. 이 둘을 함께 공부하면, 주님의 부활이 교회 신앙의 토대가 될 뿐 아니라, 실제로 역사의 현장에서 어떻게 열매 맺어야 하는지 방향까지 잡을 수 있다.

교회와 성도들은 부활절을 맞이할 때마다, 단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부활 생명에 동참하여 세상 가운데 사명을 감당하는 길"을 다시금 다짐해야 한다. 이 다짐은 개인의 삶에서도 적용된다. 직장에서든 가정에서든, 전도의 열정을 품고 "그물을 던지는" 순종을 할 수 있으며, 성찬과 예배를 통해 내 영혼을 먹이시고 돌보시는 주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다. 그리고 우리 주변의 믿음의 형제자매들, 특히 연약한 사람들을 '목양'하는 마음으로 세워 줄 수 있다. 그때 "주여,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는 고백이 우리의 삶 전체를 통해 증명될 것이다.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는 바와 같이, 교회는 언제나 부활 신앙으로 세상을 섬기고,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릴 때 갈등과 혼돈이 찾아오더라도 "너는 나를 따르라"는 명령에 집중해야 한다.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그 복음 안에서 생명을 얻은 우리가 그 생명을 나누고, 서로 돌보고, 주님께 합당한 예배와 찬송을 드리는 것,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 21장이 던지는 최종적인 메시지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는 말씀은, 주를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모든 성도가 감당해야 할 거룩한 책임이며, 교회가 교회 되게 하는 가장 분명한 표지이다. 그리고 이 명령을 따르는 과정에서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통해 삶의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부활을 믿는 이들은 더 이상 죽음에 매이지 않으며, 세상의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소망 가운데 전진하게 된다. 장재형목사는 이렇게 말한다. "부활절 이후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다. 주님이 맡기신 일에 충실하며, 내가 사랑하는 주님이 이미 이 땅과 하늘의 모든 권세를 가지셨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오실 그분을 기다리면서, 오늘도 요한복음 21장의 자리에서, 그물을 던지고 양들을 먹이는 사명을 붙들고 살자."

교회가 계속해서 맞이할 모든 부활절에도 변함없이 주어지는 초대이고 부탁이다.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라고 묻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내 어린 양을 먹이라"라는 명령에 순종하며, 날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실제 삶으로 드러내는 것, 그것이 곧 부활 신앙을 진정으로 붙드는 길이다. 그리고 이러한 길을 걸어가는 모든 성도에게, 그리고 교회 공동체에게, 부활의 기쁨과 소망이 풍성히 임할 것이라고 장재형목사는 거듭 권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