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린도후서를 펼치는 순간 우리는 한 사도의 내면 깊숙이 내려가면서 동시에 그의 신학이 솟구치는 봉우리를 바라보게 된다. 장재형(장다윗)목사는 이 책을 교리 요약이나 조직 신학의 목차로 읽지 않는다. 그는 바울의 숨과 맥박, 곧 상처와 회복, 논쟁과 화해, 절망과 위로가 얽혀 흐르는 살아 있는 텍스트로 대한다. 그래서 고린도후서는 과거의 문서가 아니라 오늘의 교회와 신자의 자리에서 다시 현재형으로 말을 건다. 장재형목사는 그 현재형의 목소리를 "오직 은혜로 말미암는 복음의 심장을 지키려는 한 사도의 고투"로 들려준다. 바울에게 사도직의 변호는 자존심을 지키는 방어가 아니라 복음의 순수성을 보존하려는 전투였고, 바로 그 지점에서 고린도후서는 가장 인간적이면서도 가장 신학적인 기록이 된다.
그의 독법은 먼저 역사적 숨결을 회복하는 데서 출발한다. 고린도전서와 후서 사이에 놓여 있던 소실된 '눈물의 편지', 그리고 세 차례의 방문이 만들어 낸 긴장과 기대, 오해와 화해가 서신의 문장을 입체적으로 만든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겪은 격렬한 소동과 마게도냐에서 디도를 애타게 기다리던 밤의 불안은 단지 배경 설명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위로의 하나님"을 찬양하며 서신을 열어젖히는 첫 문장에 체온을 부여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체온을 놓치지 않는다. 말의 힘은 언제나 맥락에서 나오며, 바울의 문장이 힘을 가지는 이유는 그가 실제로 생명의 위협, 관계의 균열, 사도의 권위에 대한 공격을 통과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린도후서의 "위로"는 현실 도피의 달콤한 말씀이 아니라, 싸움의 한복판에서 주어지는 용기이며 방향이다.
이때 '위로'는 개인의 심리적 안정을 넘어 공동체를 일으키는 능력으로 작동한다. 바울이 "우리가 환난을 당하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라고 말할 때, 그는 고난과 위로를 사적인 감정의 진폭으로 좁히지 않는다. 하나님이 한 사람에게 흘려보내신 위로는 반드시 이웃에게로, 공동체에게로, 교회 전체의 건강으로 번져가도록 설계되어 있다. 장재형목사는 이 원리를 오늘의 목회 현장에도 그대로 적용한다. 리더가 상처를 숨길수록 공동체는 더 깊이 흔들리지만, 연약함을 정직하게 드러내고 하나님이 주신 위로를 증언할 때 그 약함이 오히려 치유의 촉매가 된다. 약함의 고백이 약함을 확대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통로를 넓힌다는 통찰은 고린도후서 전체를 관통하는 역설의 미학이다.
바울이 자신을 '질그릇'에 비유한 장면에서 이 역설은 극명해진다. 균열과 금이 간 그릇 속에 보화가 담겨 있다는 선언은 인간의 완벽함을 전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불완전함을 무대 중앙으로 불러내 그 틈으로 스며드는 은혜의 광휘를 보게 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을 통해 기독교적 권위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분명히 한다. 권위는 무오류와 과시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상처의 깊이와 헌신의 농도, 그리고 은혜의 현실성에서 나온다. 바울이 매맞음과 위험, 배고픔과 도망의 궤적을 "어리석은 자랑"으로 내세우는 까닭은, 외형의 화려함이 아니라 복음에 대한 충성, 곧 약함 속에 드러난 하나님의 능력이 진짜 표징임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세상은 성과와 규모, 카리스마를 권위의 근거로 삼지만, 바울은 그 반대로 간다. 약함이 커질수록 은혜가 더 선명해지고, 균열이 많을수록 보화의 빛이 더 도드라진다.
이 약함의 신학이 사도직의 변호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점도 중요하다. 장재형목사는 고린도후서 1장 9절,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려 함이라"를 서신 전체의 중심축으로 제시한다.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를 살 소망이 끊어지는 자리까지 이끄신다. 우리의 경험과 인맥, 전략과 자원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그 자리에서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만이 생명의 근원임을 체감한다. 이 깨달음은 문장으로 배운 지식이 아니라 절벽 끝에서 붙잡은 손의 온도로 남는다. 그래서 바울의 신뢰 고백은 과거·현재·미래의 시제를 관통한다. "그가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후에도 건지시기를 바라노라." 장재형목사는 이 삼중 시제가 신자의 시간 감각을 새롭게 만든다고 본다. 하나님의 구원은 과거의 간증으로만 남지 않고, 현재의 인내를 지탱하며, 미래의 희망을 정당화한다. 신자는 그래서 불확실한 내일을 계산으로 관리하려 들기보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께 의탁하는 법을 배운다.
고린도후서가 새 언약의 영성과 교회 사역의 본질을 어떻게 밝혀 주는지에 대해서도 그는 섬세하다. 문자로 죽이고 영으로 살리는 사역, 모세의 수건과 주님의 영이 주시는 자유, 영광에서 영광으로 옮겨지는 변모의 역학은, 규율을 강화하는 종교가 아니라 생명을 전달하는 복음을 가리킨다. 새 언약의 일꾼은 사람을 규범의 틀에 끼워 맞추는 관리자가 아니라, 얼굴에 드리워진 수건을 벗겨 주는 동행자다. 변화를 촉발하는 힘은 외적 강압이 아니라 내적 계시와 친밀에서 나오며, 그 친밀은 성령이 주시는 자유로 숨 쉬는 가운데 자란다. 그러므로 고린도후서를 따라 걸을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도덕주의와 율법주의의 피로를 내려놓고, 대신 생명과 자유의 리듬 속에서 거룩의 현실성을 배우게 된다.
바울의 정체성 신학과 사역의 방향이 화해의 직분에서 정점에 이른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선언은 도덕적 권고의 수준을 넘어 존재의 지평을 바꾼다. 장재형목사는 첫 아담과 둘째 아담, 곧 대표성의 신학을 통해 이 변화를 설명한다. 첫 사람 안에서 모든 이가 죽었듯,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자가 산다. 이때 화해의 직분은 친절 캠페인이 아니라 새 창조의 정체성을 가진 자의 자연스러운 호흡이 된다. 말하자면 우리는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혼자 돌다리를 두드리며 강을 건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다리를 통과해 전혀 다른 땅에 선 사람들이다. 그러니 화해는 선택적 미덕이 아니라 존재의 방식이며, 공동체의 윤리는 바로 이 존재론에서 흘러나온다.
연보에 관한 권면은 은혜의 경제학으로 확장된다.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 돕기를 단순한 모금 운동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는 마케도니아 교회가 가난 속에서도 넘치도록 나누는 기쁨을 예로 들며, 연보를 '은혜의 열매'라 부른다. 장재형목사는 사랑과 투명성이 결합할 때 재정은 불신의 씨앗이 아니라 찬양의 사건이 된다고 해석한다. 바울이 디도와 신뢰받는 동역자들을 세워 연보를 관리했던 방식은 오늘의 교회와 사역이 재정과 권한을 운영하는 데 표준을 제공한다. 사랑은 빛 가운데 머무르기를 좋아하며, 빛은 투명성을 낳고, 투명성은 다시 신뢰를 견고하게 한다. 그래서 연보의 기쁨은 공동체 전체의 감사와 찬양으로 되돌아온다.
10-13장으로 가면 바울은 거짓 사도들과의 논쟁을 정면으로 다룬다. 표면의 화려함과 언변, 성과와 추천서가 신뢰의 증거로 소비되던 시대에, 바울은 고난과 진실성, 거룩과 사랑을 사도성의 표징으로 제시한다. 그는 한때 셋째 하늘의 비밀을 들은 그릇으로 자랑할 수도 있었지만, 대신 "육체의 가시"를 통해 약함을 자랑한다. 주께서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가짜 권위의 가면을 벗겨낸다. 권위는 지배에서 나오지 않고 섬김에서 나오며, 능력은 과시에서 나오지 않고 비움에서 나온다. 그러니 약함을 숨기고 무오류를 가장하는 리더십은 공동체를 병들게 한다. 반대로 약함을 내놓을 때 그 자리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무르고, 공동체는 그 능력의 그늘 아래에서 다시 숨을 고른다.
이 모든 신학과 목회적 지혜는 바울의 기도 신학에서 다시 하나로 묶인다. 바울은 "너희도 기도로 우리를 도우라"고 말한다. 그는 기도를 심리적 안정의 루틴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기도는 역사의 흐름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통로이며, 교회가 십자가의 능력을 현재화하는 실천이다. 장재형목사는 고린도후서의 '위로'와 '능력'이 기도 안에서 만나 불붙는다고 설명한다. 인간의 계산이 멈추는 곳에서 기도가 시작되고, 기도가 시작되는 곳에서 하나님은 다시 역사하신다. 그래서 공동체적 기도는 바울의 구원 시제를 우리에게도 전이시킨다. "그가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후에도 건지시기를 바라노라." 그 신뢰가 교회의 일상 언어가 될 때, 우리는 불안과 통제의 언어에서 벗어나 은혜와 의탁의 언어로 살아가게 된다.
결국 고린도후서는 우리를 이동시키는 책이다. 환난에서 위로로, 약함에서 능력으로, 자기 의뢰에서 하나님 의뢰로, 분열에서 화해로, 숨김에서 투명으로, 수치에서 영광으로 옮겨가는 여정의 지도다. 장재형목사는 이 지도를 오늘에 다시 펼쳐 든다. 그의 안내에 따라 우리는 바울의 눈물 위에 서서 바울의 신학을 읽고, 그 신학을 다시 우리의 삶으로 옮긴다. 그렇게 할 때 신자는 흠 없는 도자기를 가장하려 들지 않는다. 오히려 금이 간 질그릇의 틈새로 스며드는 은혜의 빛을 기뻐하며, 나의 상처가 이웃의 위로가 되고, 나의 회개가 공동체의 치유가 되며, 나의 약함이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무는 자리가 되는 신비를 경험한다. 이 신비가 바로 고린도후서가 오늘 우리에게 남기는 실제적 유산이며, 장재형목사가 이 서신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중심 메시지다. 그 메시지는 단순하다. 복음의 심장은 언제나 은혜이며, 신앙의 길은 언제나 의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리에서, 오늘도 교회는 회복되고, 신자는 서고, 복음은 앞으로 전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