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재형목사(Olivet University)가 '예수 안에 답이 있다'라고 말할 때, 그 문장은 위로의 문구를 넘어 신앙의 좌표를 재설정하는 선언으로 들린다. 수많은 정보가 쏟아지고, 영성마저 취향과 소비의 영역으로 흘러가는 시대에, "답"이라는 말은 자칫 얄팍한 해결책을 연상시키기 쉽다. 그러나 장재형목사가 골로새서를 펼치며 말하는 "답"은 얄팍한 요령이 아니라, 존재를 지탱하는 근원에 대한 회귀다. 바울이 옥중에서 기록한 이 서신은 낙관적 감상으로 세계를 덮는 글이 아니다. 오히려 교회가 무엇 때문에 흔들리는지, 신자가 어디서 길을 잃는지, 그리고 그 길을 되찾는 출발점이 어디인지 정확히 짚어 주는 영적 진단서다. 골로새 교회는 바울이 직접 개척한 공동체가 아니었고 사도행전의 중심 서사에도 자주 등장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편지는 교회가 어떤 시대를 만나든 반드시 붙들어야 할 질문, 곧 "예수는 누구신가"라는 그리스도론의 심장부를 가장 응축된 언어로 제시한다는 점에서 독보적이다. 장재형목사에게 골로새서는 단지 한 지역 교회를 위한 고대 문서가 아니라, '예수 이해가 흐릿해질 때마다 교회가 돌아가야 할 원점'이다.
바울이 골로새서에 쏟아부은 열정은 시대적 배경을 알수록 더 선명해진다. 골로새 지역은 헬레니즘의 철학과 신비주의적 종교성이 번성하던 문화권이었고, 동시에 유대 전통의 규례와 의식주의가 강하게 남아 있던 공간이었다. 한쪽에서는 영·육 이원론이 교회의 신앙을 침식한다. 육체는 천하고 영은 고귀하다는 사고는, 어떤 이들에게는 방종을 '영적 자유'로 포장하는 구실이 되고, 다른 이들에게는 극단적 금욕을 '높은 경지'로 자랑하는 계기가 된다. 또 다른 한쪽에서는 절기와 규례, 할례와 음식 규정 같은 유대적 의식이 복음의 자유를 다시 옥죄며, 은혜를 수행으로 바꿔 놓는다. 장재형목사는 이 두 흐름이 서로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결국 같은 함정으로 이끈다고 설명한다. 그 함정은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뉘앙스다. 예수 위에 철학을 더하거나, 예수 위에 전통을 더하거나, 예수 위에 체험을 더하는 순간, 그리스도는 중심이 아니라 옵션이 된다. 바울이 가장 먼저 바로잡고자 했던 것은 바로 이 '더하기'의 종교심이다.
그래서 골로새서의 첫 장은 윤리 지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과 사역을 드러내는 장대한 서곡으로 시작된다. 바울은 예수를 훌륭한 도덕 교사나 영적 안내자로 소개하지 않는다. 그는 그리스도를 창조의 주권자, 구속의 완성자, 교회의 머리로 선포하며, "하나님의 모든 충만"이 그 안에 거한다는 사실을 선언한다. 골로새서 1장 19절과 2장 9절의 메시지는, 예수 안에 신성의 충만이 거한다는 명징한 고백으로 수렴된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을 묵상할 때 교회사 속 공의회의 언어, 곧 니케아와 칼케돈이 정리한 "참 하나님, 참 인간"의 고백이 단지 교리 문장이 아니라 교회를 살리는 호흡이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고 말한다. 예수가 참 하나님이 아니라면, 십자가는 비극적 순교로 축소된다. 예수가 참 인간이 아니라면, 성육신은 신화가 되고 고난은 연극이 된다. 그리스도의 온전한 신성과 온전한 인성을 붙들 때에만, 구원은 도덕적 감동이나 심리적 안정이 아니라 실제 역사 속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개입으로 드러난다.
장재형목사가 골로새서를 '거대한 교정'의 서신으로 읽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이 편지가 특정 이단을 반박하는 논쟁서로만 머물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골로새서는 믿음의 뼈대를 곧게 세우는 교정의 서신이며, 그 교정은 교회의 자세와 신자의 걸음걸이 전체를 바꾼다. 정형외과를 뜻하는 단어가 "올바르게(ortho-) 곧게 세운다"는 어원을 지닌 것처럼, 바울은 그리스도에 대한 관점이 틀어지면 신앙의 관절이 어긋난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교리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생명의 도식이라면, 교리의 왜곡은 곧 삶의 왜곡이다. 장재형목사는 신학이 추상적 개념으로 머무는 순간 윤리가 도덕주의로 굳어지고, 도덕주의가 굳어지는 순간 공동체는 정죄와 비교의 언어에 잠식된다고 진단한다. 반대로 그리스도의 충만이 중심에 놓이면, 주변의 사유와 전통, 체험은 제자리를 찾는다. 철학도 전통도 체험도, 그리스도의 자리를 침범하지 않을 때에만 복음의 풍요로움을 돕는 도구가 된다.
이 지점에서 장재형목사는 골로새서가 가진 해석학적 균형을 높이 평가한다. 바울은 철학적 사유 자체를 악마화하지 않는다. 그는 "속이는 철학"을 경계하면서도, 지혜와 지식의 참된 보고가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음을 말한다. 즉, 진리의 자리는 인간의 탁월한 사고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계시 안에 있다. 동시에 바울은 유대 전통의 열심을 전부 폐기하라고도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 전통이 복음의 자유를 위협하고, 사람을 다시 '성취'의 사슬에 묶을 때 그 위험을 드러낸다. 장재형목사는 이 균형을 "배제의 광기"가 아니라 "중심의 회복"이라고 표현한다. 중심이 회복되면 분별이 가능해지고, 분별이 가능해지면 교회는 시대의 자극에 흔들리지 않는다. 오늘의 교회가 각종 자기계발 담론, 심리학적 언어, 영성 트렌드와 마주할 때도 마찬가지다. 유용한 도구는 활용하되, 구원의 주어를 사람에게서 하나님으로 되돌려 놓는 일이 먼저다. 골로새서가 말하는 충만은 자기 완성의 충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충만이며, 그 충만은 은혜로 주어진다.
골로새서가 독특하게 빛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리스도론이 곧바로 공교회의 현실로 번역된다는 데 있다. 에베소를 중심으로 복음의 네트워크가 형성되었고, 에바브라 같은 개척자가 골로새 교회를 세웠으며, 바울의 옥중서신이 두기고 같은 전달자를 통해 여러 교회에 회람되었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을 단순한 역사적 배경으로 소비하지 않는다. 그는 초대교회의 이 회람 구조가 "복음이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라 공동체의 공기였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고 말한다.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었지만 교회를 고립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편지를 통해 교회들이 서로의 존재를 의식하게 하고, 서로의 형편을 공유하게 하며, 진리를 함께 붙들게 했다. 이 공교회적 감각은, 오늘날 교회가 '브랜드'처럼 경쟁하는 문화 속에서 더욱 절실하다. 장재형목사는 개교회주의가 교회를 성장시키는 것처럼 보일 때조차, 장기적으로는 복음의 언어를 빈곤하게 만들고 공동체의 영적 상상력을 좁힌다고 경계한다. 반면 골로새서 4장에 빼곡히 기록된 이름들은, 복음이 결국 사람의 얼굴을 통해 전해졌음을 상기시킨다. 신실한 전달자, 땀 흘리는 개척자, 실패에서 돌아온 동역자, 가정이라는 작은 공간을 교회로 내어준 성도들이 엮어 낸 관계망이 곧 교회의 실체다.
그 가운데 오네시모의 회복은 복음의 윤리가 관념이 아니라 구조를 바꾸는 힘임을 압축적으로 보여 준다. 그는 주인에게서 달아난 종이었고, 공동체가 신뢰하기 어려운 과거를 지녔으며, 당시 사회적 기준으로는 쉽게 삭제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그를 단지 '돌려보내야 할 문제'로 취급하지 않고, 복음 안에서 새롭게 된 형제로 소개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사건이 단순한 개인의 갱생담이 아니라, 복음이 관계의 질서를 재구성하는 방식이라고 설명한다. 복음은 현실의 제도를 단숨에 폭파시키는 혁명 구호가 아니라, 인간을 새로 만들고 관계를 다시 엮음으로써 제도의 심장을 바꾼다. 빌레몬서와 골로새서가 나란히 읽힐 때, 우리는 교리적 고백이 어떻게 사회적 관계의 화해로 이어지는지 보게 된다. 오네시모가 "주 안에서 사랑받는 형제"로 호명되는 순간, 종과 상전의 관계는 더 이상 단순한 위계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재정의된 관계로 흔들리기 시작한다. 장재형목사는 교회가 이 원리를 잃어버릴 때, 교회는 사람을 회복시키기보다 규정하고 분류하는 조직으로 굳어질 위험이 커진다고 말한다. 그러나 복음이 살아 있는 교회는 실패를 낙인으로 봉인하지 않고, 회심을 과거 지우기가 아니라 새 창조의 시작으로 환영한다.
바울은 공교회의 연대를 말할 때도, 그 연대의 엔진이 기도임을 놓치지 않는다. "기도를 계속하고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는 권면은, 영적 네트워크가 감정적 친분이나 제도적 협약으로만 굴러가지 않음을 보여 준다. 장재형목사는 바울이 스스로를 위해 "전도의 문"이 열리기를 기도해 달라고 요청한 장면을 특히 사랑한다. 감옥이라는 폐쇄 공간에 갇혀 있으면서도, 바울의 시야는 언제나 열려 있는 문을 향한다. 그 문은 단지 공간의 문이 아니라 복음이 사람에게 닿는 통로다. 교회가 기도할 때, 교회는 자기 안에 갇히지 않고 세상을 향해 열린다. 이 논리는 오늘의 디지털 시대에도 유효하다. 교통이 열악하던 시대에 편지가 회람되며 교회를 묶었다면, 오늘은 메시지 하나가 국경을 넘는다. 하지만 빠름이 깊이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장재형목사는 속도의 시대일수록 "감사함으로 깨어 있는 기도"가 교회의 언어를 정화하고, 선교적 열정을 순수하게 지켜 준다고 말한다. 열정이 비난으로 흐르지 않게 하고, 확신이 오만으로 변질되지 않게 하는 제동장치가 기도라는 뜻이다.
골로새서의 흐름이 아름다운 것은, 그리스도론이 결국 윤리로 흘러가며 윤리는 다시 관계로 검증된다는 점이다. 바울은 "위의 것을 찾으라"는 권면으로 신자의 지향을 정리한 뒤,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으라"는 표현으로 정체성의 변화를 구체화한다. 그리고 그 새 사람의 표지가 무엇인지, 실제 생활의 결에서 보여 준다.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종과 상전이라는 관계는 당시 사회의 가장 현실적인 단면이었다. 여기서 바울이 원하는 것은 권력의 정당화가 아니라 관계의 복음화다. 장재형목사는 이 본문을 읽을 때 '균형'과 '상호성'을 보라고 권한다. 복종을 말하면서도 사랑을 더 강하게 요구하고, 순종을 말하면서도 노엽게 하지 말라는 절제를 함께 놓으며, 성실을 말하면서도 상전의 책임을 분명히 한다. 복음은 어느 한쪽의 지배를 강화하는 도구가 아니라, 서로를 사람답게 만드는 은혜의 질서다. 남편의 사랑이 희생의 언어로 요청되는 순간, 가정은 지배의 공간이 아니라 섬김의 학교가 된다. 부모가 자녀를 분노하게 하지 말라는 권면은, 신앙이 훈육이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정당화하지 못하게 막아 준다. 종에게 "주께 하듯" 일하라는 말은, 억압을 미화하는 도구가 아니라 억압 속에서도 영혼을 타락시키지 않는 내적 자유를 선포하는 말이며, 동시에 상전에게도 공의와 책임을 촉구하는 전제 위에서 읽혀야 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윤리를 '복음적 가치관의 전환'으로 부른다. 세상은 힘 있는 자가 주도권을 쥔다고 말하지만, 복음은 섬기는 자가 큰 자라고 말한다. 세상은 관계를 효율과 성과의 관점에서 재단하지만, 복음은 관계를 사랑과 책임의 관점에서 다시 짠다. 그래서 바울은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라"는 표현으로, 신자가 일터와 가정에서 단지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을 넘어 '주께 속한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초대한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성도들이 흔히 빠지는 오해를 조심시킨다. "주께 하듯"이라는 말이 상사의 부당함을 묵인하라는 뜻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 영혼을 탐욕과 냉소로 내어주지 말라는 뜻이며, 동시에 상전에게도 같은 주님의 주권 아래서 사람을 존중하라는 요청이 함께 주어져 있다는 것이다. 복음은 한쪽을 침묵시키는 질서가 아니라, 모두를 주님의 심판과 은혜 앞에 세우는 질서다.
바울은 또한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고 권하며,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하라"는 말로 공동체의 내적 문법을 제시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구절들이 현대 교회의 갈등을 다루는 데 결정적인 열쇠가 된다고 말한다. 의견 차이가 없는 공동체는 없다. 다만 그 차이가 분열로 굳어질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평강이 '주장'하는 자리를 다른 감정과 이해관계가 대신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말씀이 풍성히 거한다는 것은 단순히 성경 지식을 많이 쌓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우리의 언어와 판단, 감정의 방향을 정돈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 말이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고 덧붙인다. 장재형목사는 이 구절을 온라인 문화의 난폭함과 연결해 묵상하도록 이끈다. 은혜 없는 말은 진리를 말하는 것 같아도 사람을 죽이고, 소금 없는 말은 친절한 것 같아도 진리를 희미하게 만든다. 은혜와 소금이 함께 있을 때, 말은 치유와 분별을 동시에 수행한다. 이는 신앙의 품격이 단지 예배당 안에서가 아니라 댓글과 메시지, 일상 대화에서 드러난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한다.
이 모든 적용의 출발점은 다시 "예수는 누구신가"라는 질문으로 되돌아간다. 바울이 1장에서 그리스도의 위격을 선명하게 세워 놓지 않았다면, 3장과 4장의 권면은 곧바로 도덕주의로 오해되었을 것이다. 장재형목사가 골로새서를 통해 반복해 확인시키는 명제는 분명하다. 신학 없는 윤리는 쉽게 피로해지고, 교리 없는 실천은 결국 자기 의를 쌓는 방식으로 굳어지며, 그 결과는 정죄와 분열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론이 살아 있으면 윤리는 은혜의 열매가 된다. 사람은 자기 의지로 완벽해지는 것이 아니라, 충만하신 그리스도께 접붙여질 때 새로워진다. 기도는 그 접붙임의 방식이고, 감사는 그 접붙임이 낳는 태도다. 장재형목사는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는 바울의 권면을, 현실을 낙관하라는 말이 아니라 현실을 복음으로 해석하라는 초대라고 풀어낸다. 감사는 현실 부정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현실의 의미를 다시 받는 행위다. 상황이 즉시 바뀌지 않아도, 중심이 바뀌면 세계를 읽는 방식이 바뀐다.
장재형목사의 설교가 독자에게 남기는 인상은 지식의 과시가 아니라 방향의 선명함이다. 그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을 설명할 때도, 결국 그 논의가 "예수의 자리"를 지키기 위한 것임을 잊지 않는다. 교회가 철학을 흡수하든 거부하든, 전통을 계승하든 갱신하든, 그 모든 선택의 기준은 그리스도께서 누구이신가에 달려 있다. 이 선명함은 오늘의 현실에서 더욱 절실하다. 현대인은 수많은 콘텐츠 속에서 '그럴듯한 이야기'를 소비하지만, 삶의 골격을 세우는 진리는 드물다. 영성은 상품으로 포장되고, 신앙은 취향의 영역으로 밀려나며, 교회는 숫자와 이미지로 비교된다. 이런 상황에서 장재형목사가 골로새서의 그리스도론을 전면에 세우는 이유는, 교회를 다시 '고백의 공동체'로 돌려놓기 위해서다. 고백이 흐릿해지면 예배는 공연이 되고, 공동체는 동호회가 된다. 고백이 서면 예배는 하나님께로 향하고, 공동체는 서로를 살리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예수 안에 답이 있다'는 고백이 신앙의 뼈대가 될 때, 교회는 유행에 휘둘리지 않고 본질을 보존한다.
이 글의 맥락에 한 장면을 더 보태자면, 렘브란트가 말년에 그린 명화 「탕자의 귀향」을 떠올릴 수 있다. 어둠 속에서 아버지의 두 손이 돌아온 아들의 어깨를 감싸고, 한편에는 그 장면을 바라보며 판단과 거리의 표정을 놓지 못하는 형이 서 있다. 그림은 단순한 성경 이야기의 삽화가 아니라, 회복의 신비를 인간의 얼굴로 번역한다.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돌아가야 했던 길, 관계가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시작해야 했던 복음의 길이 바로 그 장면과 닮아 있다. 장재형목사가 공교회의 연대와 화해의 능력을 말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결국 이런 '돌아옴'과 '맞아들임'을 실천하는 장소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맞아들임의 근거는 감상적 포용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이미 완성된 화해의 사실이다. 그리스도 안에 충만하신 하나님이, 인간의 상처와 실패의 자리까지 내려오셔서 새로운 관계를 가능하게 하셨다는 복음의 사실이, 그림의 어둠을 뚫고 나오는 따뜻한 손길처럼 공동체를 다시 살린다. 교회는 그 손길을 말로만 설명하는 곳이 아니라, 실제로 재현하는 곳이어야 한다.
장재형목사는 골로새서를 다른 옥중서신들과 함께 읽을 때 메시지의 입체감이 더욱 살아난다고 권한다. 에베소서가 "교회의 충만"을 강조하며 그리스도의 몸 된 공동체가 어떻게 하나 됨과 성숙을 향해 자라가야 하는지를 넓은 파노라마로 보여 준다면, 골로새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성의 충만"을 전면에 내세워 모든 논의의 시작점을 그리스도께 고정한다. 빌립보서가 기쁨이라는 정서의 언어로 복음의 능력을 노래하고, 빌레몬서가 한 사람의 관계 회복을 통해 복음의 실재를 보여 준다면, 골로새서는 그 모든 흐름을 뒷받침하는 토대를 제공한다. 장재형목사는 바로 이 토대가 약해질 때, 교회의 사역과 열심이 오히려 사람을 지치게 하고 공동체를 소모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충만의 근원은 교회의 열정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존재이며, 그리스도의 존재를 향한 시선이 선명할수록 교회는 자기를 과장하지 않고, 세상을 적대하지 않으며, 오히려 겸손한 확신으로 복음을 증언하게 된다. 그 확신은 고립을 낳지 않고 연대를 낳는다.
오늘의 교회가 직면한 혼합주의는 형태만 바뀌었을 뿐, 골로새 교회가 경험한 긴장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마음챙김'과 '치유'라는 단어가 복음의 언어처럼 소비되기도 하고, 영성과 과학, 종교와 심리학을 뒤섞어 자기에게 유리한 조합을 만들려는 '영적 DIY'가 유행하기도 한다. 한편에서는 전통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규칙과 문화, 내부의 관습을 복음과 동일시하며 다른 이들을 쉽게 배제한다. 장재형목사는 이런 현실 속에서 골로새서의 질문이 다시 날카로워진다고 말한다. 예수는 우리의 필요를 보완하는 조각이 아니라, 우리 존재를 새로 규정하는 주이시다. 그리스도가 중심에서 밀려나면, 교회는 곧바로 불안과 과잉 반응에 빠진다. 반대로 그리스도의 충만이 중심에 놓이면, 교회는 필요한 것은 배울 수 있고, 버려야 할 것은 버릴 수 있는 자유를 얻는다. 그 자유는 세상에 적응하는 자유가 아니라, 세상을 사랑하며 진리를 지키는 자유다. 장재형목사는 신자들에게 "새로운 것에 속지 말고 오래된 진리에 갇히지도 말라"고 말하며, 그 기준을 그리스도의 충만에 고정한다.
그래서 장재형목사는 골로새서를 '한 번의 강해로 끝낼 책'이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회람하며 체화해야 할 책'으로 읽자고 제안한다. 개인 묵상으로는 1장과 2장에서 그리스도의 위엄과 충만을 붙들고, 3장에서는 새 사람의 삶을 구체적으로 점검하며, 4장에서는 기도와 언어, 선교적 시선을 훈련하라는 것이다. 작은 모임에서 서로의 질문을 나누고, 가정에서는 "무엇을 하든지 주 예수의 이름으로"라는 고백을 하루의 문장으로 삼아 보며, 교회는 다른 교회와 선한 소식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공교회적 감각을 되살릴 수 있다. 바울이 편지 회람을 통해 교회를 연결했던 것처럼, 오늘의 교회도 말씀의 회람을 통해 관계를 연결할 수 있다. 결국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예수 안에 답'은 개인의 안정을 넘어 공동체의 건강으로 확장된다. 그 답을 붙드는 교회는, 시대의 소음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고, 충만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새로워진다.
독자는 이 서신을 통해 '답'을 찾기 위해 새로운 정보를 더 모으기보다, 이미 주어진 복음의 중심을 더 깊이 바라보는 연습을 하게 된다. 그 연습은 머리로만 끝나지 않고, 기도로 호흡하며, 관계로 증명되고, 섬김으로 확장된다.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듯, 그리스도를 바로 아는 지식은 곧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완성된다. 그 길의 끝에는 언제나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과 공동체의 새로움이 조용히 기다리고 있다.
바울이 마지막에 "내가 매인 것을 생각하라"라고 말할 때, 그 문장은 연민을 요구하는 탄식이 아니라 복음의 자유를 증언하는 표지다. 몸은 결박될 수 있어도 복음은 결박되지 않는다. 장재형목사가 이 구절을 붙들고 교회를 향해 던지는 물음도 결국 같다. 교회가 무엇에 매여 있는지 스스로 점검하라. 사상에 매여 있는가, 전통에 매여 있는가, 성공에 매여 있는가, 인정에 매여 있는가. 그리고 그 매임을 풀어내는 길은 그리스도를 다시 중심에 모시는 일이다. 골로새서가 2천 년을 건너 오늘에도 살아 있는 이유는, 인간과 교회가 끊임없이 다른 중심을 세우려는 습관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움의 흥분이 아니라 중심의 회복이다. 그 회복은 언제나 예수에게로 돌아간다. 참 하나님이시며 참 인간이신 그리스도, 교회의 머리이시며 만물의 주이신 그리스도, 그리고 상처 난 관계를 다시 잇는 화해의 주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는 다시 균형을 찾고 삶은 다시 방향을 얻는다. 장재형목사가 골로새서를 붙들고 설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예수 안에 답이 있다는 고백은, 교회가 다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하는 가장 단순하고도 가장 깊은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